장자(莊子)야, 놀자
Ⅰ. 처음에
현존하는 장자는 魏晉時代 郭象이 편집한 것으로 內篇 7편, 外篇 15편, 雜篇 11편 도합 33편, 64,606자로 구성되어 있다. 장자는 외양을 중시하며 위선에 사로잡힌 이들을 풍자하면서 모든 인위적인 구속을 벗어나 절대자유에 이르는 길[變化와 超越]을 가르쳐주고 있다.
장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장자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의 몫이다. 여기서는 내편인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인간세(人間世), 덕충부(德充符), 대종사(大宗師), 응제왕(應帝王)의 7편을 중심으로 무엇이 참자유(절대자유)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 장자의 가르침을 따라가 보겠다.
Ⅱ. 장자의 自由 – 소요유(逍遙遊)
장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逍遙遊를 얘기하고 있는데, 逍는 ‘노닐 소’, 遙는 ‘노닐 요’, 遊는 ‘놀 유’로 逍遙遊는 잘 논다는 뜻이다. ‘잘 논다’는 것은 사물[여기서 사물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개체를 의미한다]에 집착하지 않고 세속의 모든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이 노는 것[悠悠自適]을 말한다.
그래서 장자는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을 통해 無窮[絶對自由의 境地]의 경계를 말하고 있다.
1. 장자가 그려낸 소요유의 세계
(1)곤붕(鯤鵬)의 飛上-變化와 超越
붕새는 권세와 부귀영화, 운명과 체제, 삶과 죽음에 얽매이지 않고 절대자유의 경지에서 노니는 마음의 표상이다. 즉 변화와 초월의 흐름에 맡기는 자유인의 표상이다.
(2)막고야산(藐姑射山)의 神人-無己
장자가 말하는 막고야산은 바로 무위의 도를 갖춘 자유인이 사는 곳을 가리키며, 신인은 외물에 얽매이지 않는 순(純)의 표상이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자유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3)無名
| 《逍遙遊 §8-요임금이 천하를 허유에게 양보하다》 |
名이란 實의 客에 지나지 않는다. 실질이 주인이고 명목은 손님이다. 인생을 살면서 얻는 명예나 명성은 업적에 대한 보답일지 몰라도 때로 명예는 虛榮과 함께 하기에 지나치게 명예를 추구하다보면 삶 자체가 왜곡되게 되기 때문에 알고 보면 허황되기 이를 데 없다.
(4)神龜-無功
장자는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며 살기를 원하는 신묘한 거북[神龜]이야기를 하고 있다. 留骨而貴, 曳尾塗中. 마른 해골로 남아 귀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자유를 얻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功名을 초월하여 자유를 누리며 천수를 다하고자 하는 장자의 無窮의 경계를 엿볼 수 있다.
(5)大樹-無用之用(쓸모없는 것의 쓸모)
惠子는 말하기를, 산에 큰 나무가 있는데 큰 등걸은 울퉁불퉁하고 가지는 굽어서 재목으로서 쓸 곳이 없다고 하자, 장자는 ‘그렇게 재목으로 쓸모없는 나무라야 목수의 도끼를 받지 않고 제 수명을 다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나무를 들판[無何有之鄕]에 놔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나무 아래 누워 자유롭게 노닐 수 있다.’고 한다.
똑같은 나무를 두고 혜자는 공리적 관점에서 쓸모없다고 했지만 장자는 개체의 정신적 가치를 높이 사 大樹無用에 無何有之鄕의 절대적‧정신적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쓸모란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결국 쓸모란 관점의 문제일 뿐이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이다. 장자가 “나는 재목이 되고 재목이 되지 않는 것[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의 중간에 처신하겠다.”는 것은, 유용과 무용의 논리에 고정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회사에서 모든 일에 불만인 ‘불평쟁이’를 품질관리 책임자에, 늘 걱정을 안고 사는 ‘소심쟁이’에게 안전관리 책임자에, 회사에서 업무를 보기보다는 밖으로 돌기를 좋아하는 ‘뺀질이’에게 판매 및 홍보업무를 각 맡겼더니 회사 매출이 쑥쑥 올라갔다고 한다. 장자가 말한 大用의 적용 예이다.
2. 소요유의 경계
곤이 붕으로 변화하여 비상하기 위해서는
1)待風(기다림)
2)乘風(올라탐)
3)背風(등짐)
4)棄風(버림)의 경계를 거쳐야 한다.
이처럼 곤→붕[절대 자유의 경지]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바람[기다림, 기댐 ; 의지]이 필요하다. 그 바람마저 버려야 逍遙遊[참자유 ; 절대자유]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즉 無待[기대기의 초월], 去累[얽매임의 걷어내기]를 통해 逍遙遊의 길을 걸을 수 있다.
3. 소요유의 방법
(1)無己
무기는 주관적 자아를 버리고 자연의 본성에 따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形骸를 도외시하고 물욕과 생사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2)無功
무공은 인위적으로 功業을 세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를 위해서는 지식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3)無名
무명은 명성[명예]을 추구하지 않는 것으로 예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처럼 진정한 逍遙遊는 六氣[陰, 陽, 風, 雨, 晦(회, 暗), 明]의 변화에 따라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경지로 無己, 無功, 無名에 이르러야 비로소 無窮의 경지 즉 大小, 多少, 彼我의 구별이 없는 참 자유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경지에 이른 이를 至人, 神人, 聖人이라고 하는데, 至人은 사심[自我]이 없고, 神人은 공적이 없으며, 聖人은 명성이 없다고 한다.
4. 자유의 단계
장자는 사람이 이를 수 있는 자유의 단계를 ‘상식인-송영자-열자-지인’의 순으로 분류한다.
(1)상식인
메추라기처럼 시야가 좁은 사람들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부질없는 짓으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웃기까지 한다. 장자는 작은 일만 생각하는 마음을 ‘쑥 같은 마음(蓬之心 ; 좀생이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붕의 세계는 사물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巨視的인데 반해, 메추라기의 세계는 사물이나 현상을 개별적ㆍ부분적으로 분석하는 微視的 관점이다.
대붕은 허구적 새고 메추라기는 현실적 새로 메추라기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각자의 눈[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그 대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내가 보는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지언정 소요의 경지는 같을지 모른다.
(2)송영자(宋榮子)같은 사람
송영자는 송나라 사상가로, 칭찬이나 모욕에 개의치 않고 초연했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직도 內心과 外物의 분별을 뚜렷이 하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분별의 마음이 있는 상태다
(3)열자(列子)와 같은 사람
바람을 타고 올라가 마음대로 노닐다가 열닷새가 지나 돌아왔다. 행복에 연연하지 않지만 아직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을 만큼 초연하지는 못하다[여전히 무언가에 의존했다]. 자유자재로 노닐다가 15일이 지나 돌아오기 위해서는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4)지인(至人), 신인(神人), 성인(聖人)의 단계
자신에 집착하지 않고 공적에 무관하고 명예를 탐내지 않는다. 즉, 망기(忘己 ; 몸의 안위를 잊는다), 망공(忘功 ; 공을 잊는다), 망명(忘名 ; 이름을 잊는다)을 경험하는 절대자유의 단계다.
지인(至人)은 사심이 없어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신인(神人)은 공적을 생각하지 않으며, 성인(聖人)은 명성에 관심이 없다.
그래야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吾喪我]. 자기 부정을 통한 인격의 상승, ‘잊혀야 하는 자기(我)’에서 ‘잊고 부정하는 자기(吾)’로의 인격적 진화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일상을 살다보면 메추리 같은 시야와 쑥 같은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음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Ⅲ. 장자의 世界觀-齊物論
1.萬物齊同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같은 격[가치]을 가지고 있다. 만물이 본래 완성도 파괴도 없이 다 함께 하나라는, 절대평등의 경지를 깨닫는 것이 장자가 말하는 도의 세계다.
태초에 無가 있었으니 그 無가 道이다. 천지만물 생성의 총원리를 道라 하고, 각 사물의 생성원리를 德이라고 한다. 따라서 형체는 道없이 생길 수 없고, 생성은 德없이 구현될 수 없다. 儀則은 천지[자연]의 본래의 법칙으로 자연과 더불어(與天和) 德에 따라 행하고 道를 좇아 나아가는 것, 즉 인간과 사물의 천성에 순응하는 것이다.
莊周의 나비의 꿈[胡蝶之夢]이야기에 의하면,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고, 그 나비가 또 꿈을 꾸어 장자가 되고, 그 꿈속에서 장자가 또 꿈을 꾸어 또 나비가 되었다. 이것을 만물의 변화인 物化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비는 자유[영혼]를 상징한다. 세속의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한데 모아 외물과 자아를 잊어버리면 物我一體의 절대경지에 이르게 된다. 상대가 없는 경지, 차별이 없는 세상, 이것이 장자가 그리는 이상향이다.
세속은 사람을 정치적, 사회적 계급에 따라 귀천을 분별하므로 귀천은 사람의 인격과는 무관하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은 동등하지 않은 것이 없다. 더욱이 도와 합일할 수 있다면 일체의 분별을 행하지 않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인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2.大言不辨(大辯不言)
논쟁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어렵다. 논쟁은 끊임없는 시비를 낳을 뿐이니 최고의 논쟁을 논쟁하지 않음에 있다.
최고의 도의 경계는 오로지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이지 논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大道不稱].
그래서 제물론에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키고 天鈞 속에서 쉰다. 그것이 바로 兩行[두 가지를 동시에 인정함]이다.”라고 말한다. 천균(天均) 속에서 쉰다함은 자연 그대로 맡겨둔다는 말이다.
만약에 어떤 것을 옳다고 고집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의 견해는 모두 옳다. 모두 옳기 때문에 그대로 맡겨두고[聽其自爾] 논변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 사실은 전체의 아주 작은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불필요한 논쟁으로 서로 지치고 부대끼는 소모전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3.井底之蛙
정저지와는 제자백가의 편협한 변론을 비유하고 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아직 배우지 않은 지식이 많아지며, 아직 배우지 않은 지식이 커질수록 자신이 배운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고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어렵기만 하니 자신이 안다고 믿고 있는 것도 결국은 확신에 찬 긍정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보면 뭘 모르는 이들이 세상 전부를 알고 있는 양 떠들어대니 이는 언어를 빙자한 폭력이다.
우주만큼 廣大無邊한 앎의 세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터럭에 지나지 않으니 뭘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몹시 지치고 설사 조금 더 안다고 해서 큰 의미도 없다.
4.生死觀
生死를 일종의 자연현상으로 보아 죽음은 생의 일부분[삶의 한 과정]이기에[死生同狀, 死生爲一條] 죽음을 신비롭게 여기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이 좋은지 모르고 죽음이 나쁜지 모른다. 인간의 생명은 자연에서 나와 결국 자연으로 되돌아갈 따름이다. 즉 죽음은 氣가 변하여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이다.[循環的 世界觀] 이처럼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생사에 대한 해탈로 달관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장자 역시 처음에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이 정념[情]이다. 그 후 문제의 시원을 고찰하는 것은 이성으로써 정념을 순화했다는 말이다. 이성으로 정념을 순화하면 哀樂은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태어난 때에 편안히 머물다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여 돌아가면 슬픔이나 즐거움[감정]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다.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氣가 모였다 흩어지는 일이다. 氣의 聚散作用으로 氣가 모이면 살아있는 것이고 氣가 흩어지면 죽는 것으로 현상만 변화하였을 뿐 그 본질인 氣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죽음을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한 준비로 보았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이쯤에서 내가 죽을 때 후회하는 다섯 가지 몰록을 작성해 보는 건 어떨까? 더 나아가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잘’ 살다가 ‘잘’ 죽어야 할 것이다.
5. 言語觀
| 《天道 §13》 제나라 환공(桓公)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윤편(輪扁)은 대청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윤편은 망치와 끌을 놓고서 제나라 환공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하기를 “성인의 말씀이니라.” 편이 묻기를 “그 성인은 살아계십니까?” 공이 대답하기를 “이미 돌아가셨느니라.” 편이 답하기를 “그렇다면 대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입니다.” 환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책을 읽는데 수레바퀴나 깎는 네놈이 무슨 참견이냐? 네가 변명할 구실이 있으면 괜찮겠지만 변명을 못하면 죽이리라.” 윤편이 말하기를 “저는 제가 하는 일의 경험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느리면 헐렁해서 꼭 끼이지 못하고 빨리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는 것은 손에 익숙하여 마음에 응하는 것이라 입으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익숙한 기술[비결]이 있는 것이니 저는 그것을 제 자식에게 가르칠 수가 없고 제 자식도 그것을 저에게서 배워갈 수가 없어서 이렇게 제 나이가 70이 되도록 늙게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날의 성인도 마찬가지로 깨달은 바를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읽으시는 것도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환공독서어당상, 윤편착윤어당하, 석추착이상.)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문환공왈 감문공지소독자, 하언사?) 公曰 “聖人之言也”(공왈 성인지언야) 曰 “聖人在乎?”(왈 성인재호?) 公曰 “已死矣.”(공왈 “이사의.) 曰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왈 연즉, 군지소독자, 고인지조백이부.)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환공왈 과인독서, 윤인안득의호? 유설즉가, 무설즉사.)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斲輪徐, 則甘而不固, 疾, 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君之所讀者,古人之糟魄已夫.”(윤편왈 신야, 이신지사관지, 착윤서, 즉감이불고, 질, 즉고이불입. 불서불질, 득지어수, 이응어심, 구불능언. 유수존언어기간, 신불능이유신지자, 신지자역불능수지어신. 시이행년칠십이노착윤. 고지인, 여기불가전야, 사의. 연즉군지소독자, 고인지조백이부.)] |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 속에 담긴 뜻이 중요하지 그 말을 전달하는 수단인 언어나 문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장자도 글의 힘을 믿지 않았다. 글은 말을 다 담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어리석음처럼 책이 전하는 말만 탐닉하고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는다면 책은 찌꺼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윤편의 수레바퀴 이야기에 의하면 책은 ‘과거에 이러 했었다’는 될 수 있지만 지금이나 미래에도 ‘이렇고, 이렇게 해야 한다’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몇 번의 경험으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 다음에는 상황이 변했어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장자는 이렇게 굳어진 마음을 ‘제물론’에서 ‘성심(成心)’이라고 불렀다. 한 번 마음이 굳어지면 여간해서 바꾸기 어렵다. 이 대목에서 장자는 다음처럼 말했다.
“굳어진 마음을 따라서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느 누가 스승이 없겠는가?”(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6. 相對的認識論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요즘 세태에서 사회적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
뭐든지 상대적으로 인식하면 더 편안해지고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장자는 영원불멸의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는 상대론적 인식론에 입각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어떤 지식이든 모두 그것이 발생한 시간적‧공간적 조건을 고려해야 하고, 처음부터 끝 까지 변함없이 온 세상에 두루 통용되고 고금을 관통할 수 있는 진리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 《山木 §3-虛舟》 어떤 이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빈 배가 떠나려오다가 그의 배와 부딪쳤다.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비켜가지 못하겠느냐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칠 것이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는가? [方舟而濟於河 有虛舟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방주이제어하 유허주래촉주 수유편심지인불노) 有一人在其上 則呼張歙之(유일인재기상 즉호장흡지) 一呼而不聞 再呼而不聞 於是三呼邪(일호이불문 재호이불문 어시삼호사) 則必以惡聲隨之 向也不怒而今也怒 向也虛而今也實(즉필이악성수지 향야불노이금야노 향야허이금야실) 人能虛己以遊世 其孰能害之(인능허기이유세 기숙능해지) |
모든 사람의 지식에는, 그 대상자체가 변하거나 인류의 인식수준이 발전하면서 끊임없이 수정ㆍ보완되는 과정에 있다는 문제점과 우리 자신의 판단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니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객관적이고 주관적인지, 무엇이 절대적이고 상대적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장자의 주장은 주입된 관념이나 시비기준으로 자신을 옭아매지 말고 그 관념이나 시비기준도 상대적이므로 그것을 초월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Ⅳ. 장자의 處世術-養生經
1.養生의 근본
장자는 삶을 해치는 행위로 지식 추구, 선과 악을 들고 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지식은 무한하기 때문에 유한으로 무한을 추구하면 결국 심신을 상하기 때문이요, 좋은 일을 하면 명성을 얻고 나쁜 일을 하면 형벌을 당하게 되어 결국 자아를 잃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中道를 따르면[緣督以爲經 ; 선악에 얽매이지 않는 중간의 입장을 따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자신의 몸을 보전하고(保身),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으며(全生), 부모를 보양하고(養親), 천수를 누릴 수 있다(盡年).
결국 養生은 나에게 애초 참되게 주어진 ‘生’을 잘 기르고 보존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즉 양생의 길이 진정 잘 사는 길이요, 바르게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 《養生主 §4,5,6-포정해우(庖丁解牛)》 문혜군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였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즐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소를 신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눈의 작용]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따라 큰 틈새에 칼을 찔러 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 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靭帶 ; 살이나 뼈)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평범한 소잡이는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니 그것은 뼈에 칼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칼은 19년 동안이나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이 날카롭기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에다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여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19년이나 사용하였지만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근육과 뼈가 엉긴 곳에 이르러서는 저도 어려움을 절감하고 두려워하면서 경계하여 눈길을 멈추고 천천히 움직여 칼 놀리는 것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러다가 쩍 갈라지면서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고기가 와르르 해체됩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이 만족스러우면 칼을 잘 씻어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터득했구나!”하고 감탄합니다. |
포정해우이야기는 소를 해체하는 기술을 통해 양생의 도를 이야기한다. 첫째 눈으로 소를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본다. 둘째 소가 생긴 그대로를 좇는다. 셋째 빈틈으로 칼을 찔러 넣는다. 넷째 엉킨 곳에서는 극도로 조심한다. 즉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결을 따라 손만 댄다는 것이다.
포정해우는 기술과 聞道가 합일되어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즉 자신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以我觀物]서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以物觀物]으로 전환하는 虛靜의 심리상태에서 자연의 大道를 따르는 것이 양생의 근본이다.
어떤 일이든 사물의 이치를 바로 알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각자의 눈[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그 대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내가 보는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장자는 여우의 입을 빌어 도를 듣는 聞道의 7가지 단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外天下(천하의 명성과 이익, 권세, 위상을 초월하라), 外物(형체를 지닌 모든 것을 초월하라), 外生(생명과 욕망의 한계에서 벗어나라), 朝徹(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라), 見獨(만물과 융합하여 하나가 되라), 无古今(시간의 한계를 벗어나라), 不死不生(생사를 초월하라)하면 道를 깨달아 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으로 聞道의 관건은 忘이라는 인생의 태도와 수양방법이라고 하겠다.
(外天下→外物→外生)⇨(朝徹, 見獨)⇨(无古今, 不死不生)⇨攖寧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영녕이란 세상에 얽혀 살되 세상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버리되 자신을 되찾는 길이다. 즉 세상에 노닐되 치우치지 않고 남을 따르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遊於世而不僻, 順人而不失己. 外物)
2. 양생의 방법
(1)心齋-소통의 방법론
장자는 인간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을, 귀로 듣는 단계[반사적 반응], 마음으로 듣는 認知단계[대상과 심리적으로 거리 두기], 기로 듣는 일에 힘쓰는 단계[無我的의 사유] 3단계로 보고 있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으로 들으라고 한다. 귀는 듣는데서 그치고 마음은 맞추는데 그치지만 기운은 비어있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人間世 §12》 안회 : 감히 심재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중니 :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여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밖에서 들어온 것에 맞추어 깨달을 뿐이지만[귀의 기능은 듣고 나면 끝나고, 마음의 작용은 인지하고 나면 멈춘다.], 기라는 것은 공허[텅빔]하여 무엇이나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참된 도(道)는 오직 공허 속에 모인다. 비움(虛)이 곧 심재[마음의 재계, 마음을 가다듬는 것, 마음을 씻어 비워내고 공손히 삼가는 일]이다. [回曰:敢問心齋(회왈 감문심재). 仲尼曰:若一志,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無聽之以心而聽之以氣 聽止於耳,心止於符. 氣也者,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心齋也.(중니왈 약일지 무청지이이이청지이심 무청지이심이청지이기 이지어청 심지어부 기야자 허이대물자야 유도집허 허자심재야)] |
마음으로 들을 수 없고 기로 들어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마음이 잡념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心齋는 잡념과 욕망을 배제하는, 즉 영혼을 정화하는 마음의 수양과정[心養]이다. 영혼이 평안하지 못한 것은 마음에 ‘나’가 너무 많이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2)坐忘
坐는 고유하게 앉아 명상한다는 뜻이고, 忘은 모든 사물을 잊는다는 뜻이다.
좌망은 고정된 나를 버리는 것, 喪我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망, 지식 등을 없애고 無己, 無功, 無名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 《大宗師 §38》 안회(顔回)가 말했다. “제가 좀 나아진 게 있습니다.” 중니(仲尼, 공자)가 물었다. “무엇을 말하는가?” “저는 인의(仁義)를 잊었습니다.” “괜찮구나. 하지만 아직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다. “저는 좀 더 나아진 게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저는 예악(禮樂)을 잊었습니다.” “괜찮구나. 하지만 아직 멀었다.” 다른 날 다시 말했다. “저는 더 나아진 게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저는 좌망(坐忘)에 이르렀습니다.” 중니가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면서 물었다. “무엇을 좌망이라 하느냐?” 안회가 대답했다.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서 육체[형체]를 떠나 지식을 버리고[지식의 속박에서 벗어나] 큰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중니는 말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하는 구별이 없어지고 한군데 집착하지 않게 된다. 자네는 정말 훌륭하구나. 내, 자네 뒤를 따라야겠다.” [顔回曰, 回益矣. 仲尼曰, 何謂也. 曰, 回忘仁義矣. 曰, 可矣, 猶未也. 他日復見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忘禮樂矣. 曰, 可矣, 猶未也. 他日復見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坐忘矣. 仲尼蹴然曰, 何謂坐忘. 顔回曰,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仲尼曰,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而果其賢乎. 丘也請從而後也.(안회왈 회익의 중니왈 하위야 왈회망인의의 왈가의 유미야 타일 부견왈 회익의 왈하위야 왈회망예악의 왈가의 유미야 타일 부견왈 회익의 왈하위야 왈회좌망의 중니축연왈 하위좌망 안회왈 타지체 출총명 리형거지 동어대통 차위좌망 중니왈 동칙무호야 화칙무상야 이과기현호 구야청종이후야.] |
타지체(墮肢體)와 이형(離形)은 생리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출총명(黜聰明)과 거지(去知)는 보편적인 지식활동을 잊어버린다는 것으로 坐忘의 핵심은 忘知, 즉 지식으로 인해 욕망이 넘치지 않도록 함에 있다. 이형(離形)은 감각적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생리적 욕망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을 초연하는 것을 말하며, 거지(去知)는 仁義와 機心[교활하게 속이고 세세하게 계산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과심(刳心)]이다.
心齋나 坐忘은 부정을 통한 영혼정화의 방법으로 心齋는 감각적 지각을 물리치는데 중점이 있고, 坐忘은 이성적 요소를 물리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3. 장자가 말하는 양생의 모습
장자가 말하는 양생은 단순한 생활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기르고 지키는 일, 즉 自由自在의 생활을 말한다. 천성을 온전하게 즐기는 것을 得志라 하고, 물욕에 빠져 자아를 잃고 세속으로 인해 본성을 잃는 자를 본말이 도치된 사람(倒置之民)이라 한다.우리가 식당에 가서 ‘뭘 먹을까?’하고 물었을 때 ‘아무거나.’라고 하는 것 역시 자기 자신보다 외물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1) 木鷄之德
장자는 여기서 최고수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첫째는 ‘자신이 제일이다.’ ‘최고다.’라는 교만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남의 소리와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요, 셋째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눈초리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만과 조급, 성냄의 눈빛을 완전히 극복하여 항상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목계의 덕을 가진 고수’[呆若木鷄(태약목계) ; 나무로 깎아 만든 닭처럼 무표정하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의 싸움닭은 결코 뽐내지 않는다.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자야말로 무적의 강자요, 무심만이 최대의 무기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는 곧 정신을 감추고 기운을 지킨다[藏神守氣]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2) 四六法則
경상초(庚桑楚)에 나오는 소위 사륙법칙이란 24가지의 인생환란을 가리킨다. 장자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네 가지 정황과 그 정황에 속하는 여섯 가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고통과 환란에서 벗어나려면 의지의 착란(錯亂)을 해소하고, 마음의 속박을 타개하며, 덕성의 부담을 덜고, 대도에 이르기까지 장애물을 제거하여야 한다. 사람의 의지에 착란을 일으키는 것은 尊貴, 富裕, 顯達, 權勢, 名聲, 利得이고, 사람의 마음을 속박하는 것은 容貌, 行動擧止, 낯빛, 情理, 氣息[말씨], 意志이며, 사람의 덕성에 누를 치는 것은 憎惡, 愛慾,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며, 대도에 도달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就任, 退任, 얻음, 줌, 지식, 재주다. 이들을 제거하든가 배제하면 사람의 마음이 평정을 얻게 되고, 평정을 얻으면 편안해지고, 마음이 편안하면 명정해지고, 명정해지면 텅 비어 虛靜에 이를 수 있어 자연에 따라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
Ⅴ. 장자의 人生觀-人間世
1.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
(1) 매미를 잡으려는 사마귀, 그 뒤에서 사마귀를 노리는 까치처럼 서로 먹고 먹히는 싸움의 세계다. 장자는 “형체에 사로잡혀 내 자신을 잊고 있었다. 흙탕물을 보느라 맑은 연못을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즉 자신의 참됨을 지켜야 마음의 청정과 정신의 자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어물전에 놓인 건어물[枯魚之肆(고어지사)]같은 신세와 같이 온갖 고통과 험난함[곤궁하고 절박한 처지]에 지쳐있다.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훗날의 황금 만냥보다는 밥 한 그릇이 필요할 것이고, 물이 없어 죽어가는 물고기에게는 훗날 천지대해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한 동이의 물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네 사람은 수레바퀴 자국 괸 물속에서 서로 도움을 필요 로 하는 존재가 아닐까?
2. 진정한 삶이란?
(1)장자는 자연에 순응하는 삶, 無爲自然의 삶을 주장한다. 이처럼 본성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좋은 삶이다.
인간적인 有爲의 행동이 자연의 본성을 훼손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장자는 혼돈[자연의 질서, 天理]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과 한 무리가 되며(與天爲徒), 자연과 사람이 다투지 않아야 함(天與人不相勝)을 주장하고 있다.
추수 편은 말한다. “인위[작위]로써 자연[天]을 멸하지 말며, 智謀로써 性命을 훼손하지 말라.”
(2) 배려하는 共存의 삶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의 사랑이 때론 상대방을 희생시킬 수 있다. 이는 사랑을 가장한 폭력일 수 있다. 그러니 남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 《至樂 §8》 옛날에 어떤 바닷새가 노나라 교외에 와서 내려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맞이하여 종묘로 불러들여 잔치를 열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좋은 음식으로 안주를 삼았다. 새는 눈을 멍하니 뜨고 근심과 슬픔으로 한 조각의 고기도 먹지 못하고,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하고서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기 때문이다. 그는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던 것이다.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于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석자해조지어로교 로후어이상지우묘 주구소이위락 구태뢰이위선 조내현시우비 불감식일련 불감음일배 삼일이사 차이기양양조야 비이조양양조야)] |
바닷새의 타고난 본성을 무시하고 우격다짐으로 베풂은 어리석은 짓이다. 새를 키우는 방법으로 바닷새를 키우지 않고 사람을 부양하듯 대했다. 다시 말해 바닷새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아니 자신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상대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자신을 위한 사랑[자신의 욕망을 투영]을 했던 것이다.
(3) 소통하고 조화로운 삶
| 《齊物論 §13-朝三暮四》 헛되이 애를 써서 한쪽에 치우친 편견을 내세우면서 본디 동일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일러 ‘조삼(朝三)’이라고 한다. 조삼이란 무엇인가?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狙公(저공)]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고 하였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였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상에 다름이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이는 또한 주관적인 판단으로 인해서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의 대립을 조화시켜 천균(天釣 ; 자연스런 가지런함)에 편안해 한다. 이를 일러 양행(兩行 ; 옳고 그름이 함께 하는 것, 마음의 균형 잡기)이라고 한다. |
위 朝三暮四의 고사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본질은 같은데, 다만 기쁨과 성냄의 작용은 달랐다. 이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是非]를 조화시켜 자연스런 가지런함에 편안해 하는 것이요, 이를 두고 옳고 그름이 함께한다고 하는 것[兩行]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들을 수량으로 환산하여 一喜一悲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원숭이들은 없는지 자문하게 된다. 9만 9천원이라고 하면 싸다고 벌떼같이 몰려들고 10만원이라고 하면 외면하는 우리네 모습과 뭐가 다른가?
3. 인생의 금기
장자가 산길에서 큰 나무를 보았는데 벌목꾼들이 쓸모없다며 베지 않았다. 장자가 친구 집에 들렀는데 울지 못하는 쓸모없는 거위를 잡아 대접했다. 큰 나무는 쓸모없어서 죽지 않았고, 거위는 쓸모없어서 죽게 되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장자에게 묻는다. “산에서 본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누렸는데,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잡아 먹혔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까요?”(山木 §1) 여기서 장자는 재능 있음과 재능 없음의 중간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재능 있음과 재능 없음의 중간’은 겉모습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 같지만 정말로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의 쓰임이 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쓰이는 것’이 되면 현실적인 이해의 충돌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유용한 것, 무용한 것 그 어느 쪽도 집착하면 禍를 자초하게 된다. 또 중간에 머문다 해도 그 자체가 有爲인 이상 禍를 면치 못한다. 다만 是非를 초월한 자연의 大道에서 逍遙하는 자만이 禍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여덟 가지 병폐[八病四禍]
① 자기가 할 일이 아닌데도 나서서 하는 것[摠(총), 주제넘음]
② 남이 듣지 않는데도 굳이 진언하는 것[佞(영), 망령]
③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맞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諂(첨), 아첨]
④ 시비를 가리지 않고 남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諛(유), 아 부]
⑤ 등 뒤에서 남의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것[讒(참), 참소]
⑥ 친한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賊(적), 이간질]
⑦ 의도적으로 칭찬하고 속여 죄악에 빠뜨리는 것[慝(특), 사특 함]
⑧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몰래 얻으려는 것[險(험), 음험함]
(2)네 가지 허물
① 큰일을 벌여놓고 공명심만 쫓는 것[외람됨, 무엄함, 叨(도)]
② 지혜로운 척 멋대로 행동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남의 것 까지 빼앗는 것[탐욕, 貪(탐)]
③ 허물이 있음에도 고치지 않고 남의 충고를 들으면 더 악랄 해지는 것[꼬여 있음, 완고함, 很(흔)]
④ 자기와 의견이 같으면 좋아하고 의견이 맞지 않으면 좋은 것일지라도 나쁘다고 하는 것[불쌍함, 교만, 矜(긍)]
4. 인재의 식별-九徵
공자의 말을 빌어서 “무릇 사람의 마음은 산천보다 험하고 하늘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보다 어렵다. 하늘에는 그래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과 아침과 저녁의 구별이 있지만, 사람은 겉모습이 두터워 감정이 깊이 숨어 있다.”고 말한 뒤, 사람의 眞情을 알아보는 아홉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음에 열거한 구징(九徵)의 방법이다.
①먼 곳에 심부름을 시켜 충성심을 살핀다[遠使之而觀其忠].
②가까이 두고 일을 시켜 공경의 마음을 살핀다[近使之而觀其 敬].
③번거로운 일을 시켜 그 능력을 살핀다[煩使之而觀其能)]
④갑자기 질문을 던져 그 지혜를 살핀다[卒然<能>問焉而觀其 知].
⑤긴박한 임무를 맡겨 그 신용을 살핀다[急與<于>之期而觀其 信].
⑥재물을 맡겨 청렴을 살핀다[委之以財而觀其仁].
⑦위급한 상황을 알려 그 節義를 살핀다[告之以危而觀其節].
⑧술에 취하게 하여 몸가짐을 살핀다[醉之以酒而觀其側<態>].
⑨남녀가 혼숙하게 하여 여색에 대한 태도[節操]를 살핀다[雜 之以處而觀其色].
이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眞情은 의도적인 과장이나 수식이 필요하지 않고 어떤 허위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 참됨이 있어야 善과 美도 존재하는 것이다.
장자는 眞情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것은 예의나 형식이 아니라 내재적 의의와 정신이라고 하면서 하늘을 본받고 참됨을 귀하게 여기라[法天貴眞]고 당부하고 있다.
呂氏春秋 十二紀(季春紀) 論人 篇에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 으로 기술된 八觀六驗法은 인재를 가릴 때의 여덟 가지 살필 점과 여섯 가지 시험해봐야 할 점을 나열한 것이다.
여덟 가지 살필 점은 다음과 같다. 1) 잘나갈 때 어떤 사람을 존중하는가. 2)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을 쓰는가. 3) 부유할 때 어떤 사람을 돌보는가. 4) 남의 말을 들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 5) 한가할 때 무엇을 즐기는가. 6) 친해진 뒤 무슨 말을 털어놓는가. 7) 좌절했을 때 지조가 꺾이는가. 8) 가 난할 때 무엇을 하지 않는가. 즉 사람의 됨됨이에 대한 것을 보 라는 것이다.
그리고 6험은, 사람을 여섯 가지 감정의 상태 즉 기쁘게, 슬프 게, 성나게, 즐겁게, 두렵게, 힘들게 만들어 어떤 반응을 보이는 지, 숨은 성격은 없는지 등을 점검하라는 것이다.
요즘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시끄러워 귀를 어지럽히니 곱씹어 볼만하다.
5. 장자의 어짐이란?
예의란 서로를 불편하지 않게 하는 배려다. 예의란 그런 최소한이다. 장자는 그 최소한에 발목 잡혀 최대한의 기회를 잃는 것을 걱정한다. 결국 예의에 갇혔을 때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것이지 그 최소한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지극한 어짊은 친함이 없다. 동시에 지극한 예는 남을 남으로 보지 않는다(至禮有不人).
Ⅵ. 眞人이란?-政治觀
장자의 眞人은 이상적인 인격을 갖춘 사람이다. 眞人은 마음에 걱정이나 근심도 없고, 기쁨이니 슬픔도 없다. 또한 삶과 죽음을 잊고 대도에 부합할 따름이다. 그래서 장자는 絶聖棄智, 즉 성인의 가르침을 끊고 지식을 버리며 오로지 자기수양에 전념하는 至人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眞人은 결코 명리나 권세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
장자의 정치관은 오직 자기 마음의 제왕이 되는 것, 즉 타인이나 외물에 얽매이거나 속박당하지 않는 사람이 천하의 제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Ⅶ. 맺는말
장자는 형이상학적인 사유이고, 논어는 현실적인 사유를 대변한다. 그래서 공자는 장자에 대해 ‘그는 하나[자연]는 알지만 둘[인간사회]은 모르네. 내면[마음]은 다스리나 밖의 일[세상사]은 다스리지 못하네.’라고 지적하고 있다. 장자야말로 진정한 方外之士다.
장자는 결국 길들여진 삶을 거부하였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隨處作主), 不得已를 버리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 이는 불교의 華嚴의 세계, 즉 모든 사람이 자기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과 같다.
장자를 읽고 나서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과 지식의 유한성, 진리의 상대성,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한 논박, 인간의 정신에 가해진 속박을 벗어나기 위한 자유정신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장자는 마음을 채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 세상을 직접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自適은 스스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여기서 장자의 外篇 騈拇(변무)와 天地에 나오는 장자의 말씀을 끝으로 음미하면서,
| 《騈拇 §8,9》 내가 말하는 귀 밝음[총]이란 저들한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한테 귀를 기울이는 것이요, 내가 이른바 눈 밝음[명]이라 하는 것은 저들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무릇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들만을 본다거나 자기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만 부러워하는 것은 남들이 소유한 것만 집착하고 자기 것에 만족할 줄 모르며, 남들이 가는 곳으로만 가려 할 뿐 스스로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다. [吾所謂聰者(오소위총자) 非謂其聞彼也(비위기문피야) 自聞而已矣(자문이이의) 吾所謂明者(오소위명자) 非謂其見彼也(비위기견피야) 自見而已矣(자견이이의). 夫不自見而見彼(부불자견이견피) 不自得而得彼者(불자득이득피자) 是得人之得而不自得其得者也(시득인지득이불자득기득자야) 適人之適而不自適其適者也(적인지적이불자적기적자야).] |
외물을 쫒는 속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虛己된 삶을 살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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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완샤(万夏, 심규호 옮김), 일빛, 2011
소요유 장자의 미학, 왕카이(王凱, 신정근 옮김),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3
먼짓길 인생에 장자를 만나다, 왕이자(王溢嘉, 박성희 옮김), 북스넛, 2015
느림과 비움의 미학, 장석주, 푸르메, 2013
그때 장자를 만났다, 강상구, 흐름출판, 2014
맹자와 장자, 희망을 세우고 변신을 꿈꾸다, 신정근, 사람의 무늬, 2014
중국철학사(상), 풍우란(馮友蘭, 박성규 옮김), 까치글방, 2014, 355~394쪽
고대중국철학사상,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4, 189~211쪽
동양을 만든 13권의 고전, 쑤치시(徐緝熙)‧웡치빈(翁其斌) 외(김원중 외 옮김), 글항아리, 2013, 129~175쪽
인문고전100선읽기, 최효찬, 위즈덤하우스, 2014, 287~302쪽
인문학명강, 강신주외, 21세기북스, 2013, 196~217쪽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50, 톰 버틀러 보던(Tom Butler-Bowdon, 오강남 옮김), 흐름출판, 2009, 57~66쪽
고전의 힘, 부산대학교교양교육원 엮음, 꿈결, 2013, 371~380쪽
*더 읽을거리
장자, 오강남 풀이
융팡(永放, 윤덕노 옮김), 장자의 내려놓음, 매일경제신문사, 2013
감산덕청(憨山德清, 심재원 옮김), 장자, 그 禪의 물결, 정우서적, 2012
푸페이룽(傅佩榮, 심의용 옮김), 장자교양강의, 돌베개, 2011
푸페이룽(傅佩榮, 한정선 옮김), 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지와 사랑, 2012
왕멍(王蒙, 허유영 옮김), 나는 장자다, 들녘, 2011
왕멍(王蒙, 허유영 옮김), 왕멍의 쾌활한 장자 읽기, 들녘, 2013
망각과 자유:장자읽기의 즐거움, 강신주, 갈라파고스, 2014
장자:사유의 보폭을 넓히는 새로운 장자 읽기, 앵거스 그레이엄(Angus Charles Graham, 김경희 옮김), 이학사, 2015
장자처럼 살라, 박홍순, 한빛비즈, 2014
나는 매일 장자와 함께 퇴근한다, 한장쉐(寒江雪, 고예지 옮김), 오늘의 책,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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